10월에 접어들며 갑작스레 날이 서늘해졌다. 아침부터 반팔티를 꿰어입고 건이와 산책을 나선 길, 옷 사이로 드는 찬 바람에 놀라 건이와 함께 펄쩍펄쩍 뛰어댔다. 어느 정도 몸에 열이 오르고 찬 공기를 크게 들이 마셨다.
코로 든 맑은 공기가 머릿속을 가득 채우곤 찌꺼기들을 몰고 나간다. 그런 순간에 나는 조용한 생각들을 만나기도 한다. '어려울 것 없어. 몸을 편하게 만드는 것, 적당한 음식을 먹는 것, 아름다운 장소에 있는 것이 내가 원하는 일이야.' 그런 것들이 빠르게 머릿속을 훑고지나가고, 잠시 뒤 평소처럼 잊는다. 그런 것들이 지나가면, 나는 또 누가 내게 짐이라도 맡겨둔 양 재미없는 표정으로 살아간다.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거장의 시선전을 보고 왔다. 평일이었는데도 사람이 어찌나 많던지. '거장의 시선'이라는 제목 답게 예술가들이 신화,사람,빛을 다루는 방식을 보였고, 시대에 따른 변화대로 흐름이 이어졌다. 전시장은 그런대로 넓었으나 사람이 많았고 다른 사람을 신경써야하는 일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에 온전히 집중할 수는 없었으나, 마지막 작품 즈음에서 요즘 생각하고 있는 것들과 만나기도 했다.

전시의 마지막 작품은 모네의 붓꽃이었다. 길이가 2미터에 달하는 붓꽃. 그 앞에서 사람들이 연신 사진을 찍었다. 그것을 보며 도쿄의 국립서양미술관에서 모네의 수련을 본 기억이 떠올랐다. 그 곳은 그림의 분위기처럼 조용하고, 사람이 거의 없는 곳이었다. 상설전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빌려온 작품이어도, 그것을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 틈바구니더라도, 모네의 붓꽃을 만난 건 특별한 일이었다.

모네의 작품을 가장 최근에 본 것은 이건희컬렉션 특별전이었는데, 이번에 본 작품인 붓꽃은 내가 기억하던 모네보다 무척 거칠고, 심지어는 가장자리를 채우지 못한 작품이었다. 모네는 말년 백내장을 앓으며 캔버스의 가장자리를 채우지 못한 것을 깨닫지 못할 정도로 시력을 잃었다. 붓꽃은 그 시기의 작품이다.
기대하던 것과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째서인지 그 거친 붓터치와 빈 틈에 마음을 빼앗겼다. 시력을 잃어가고 있음에도 열정은 잃지 않은 화가의 모습이 북적거리는 사람들 속에서 빛이 났다.
마지막 즈음에는 고흐의 작품도 있었다. 빈센트 반 고흐의 생애에는 여러가지 의문이 남아있다. 가령 어째서 자신의 귀를 잘랐으며, 그것을 여인에게 건넸느냐는 것과 같은. 오랜 기간 그를 괴롭혔던 정신병, 고갱과의 갈등, 여인에 대한 사랑이 그 이유로 추정되고 있으나 그가 죽은 이상 누구도 단언할 수는 없는 일이다.
가장 최근에 본 것은 그의 동생 테오와 관련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이었다. 빈센트 반 고흐와 그의 동생 테오 반 고흐. 테오는 빈센트의 예술활동과 빈센트 자신을 지지하던 몇 안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테오의 결혼 소식을 들은 직후 빈센트는 그의 왼쪽 귀를 잘라내었고, 그 길로 그것을 신문지로 감싸 여인에게 건네는 다소 괴기스러운 사건을 벌인 뒤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이 작품은 그가 입원한 정신병원의 정원을 그려낸 작품이다. 그는 죽기 얼마전인 1890년 5월 4일경 테오에게 '그림이 잘 그려진다. 새롭게 자른 잔디의 모습을 두 작품이나 그렸다.'고 편지를 썼다. 그가 귀를 잘라낸지 1년하고 반이 지난 시점이었다. 즐겁다 말하며 그려낸 풀밭에는 군데군데 나비가 날아다녔다. 나는 그게 몹시 외롭게 느껴졌다.
줄곧 거절당해온 삶에서 테오의 결혼은 분명 희미하게 기쁘고, 선명하게 절망스러운 일이었으리라. 빈센트는 테오에게 받던 지지를 잃을까 괴롭고, 혼자 남겨질 것 같은 불안속에 외로웠을 것이다. 나는 그가 그러면서도 테오의 아이를 위해 그렸던 아몬드 나무를, 정신병원에서 즐겁다며 그려낸 들판의 나비를 생각한다. 그는 예술로 사람들의 마음에 닿고 싶다고 말했다. 그가 깊고, 부드러운 감정을 느끼는 사람인 것을 알기를 원한다고. 그의 마음이 내게로 와 닿았다.
모네는 백내장을 앓으며 사랑해 마지않던 빛과 꽃, 그림을 거의 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보지 못할까 두려워했다. 고흐는 평생 자신을 실패한 화가로 여기며 생애 마지막 즈음을 정신병원에서 보냈다. 모네와 고흐는 그러면서도 삶의 마지막까지 그림을 그려냈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고통이고, 허무고, 앞으로도 그렇게 흘러갈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 인간은 움직이지 못한다. 의도를 잃는다. 의도를 잃지 않은 것으로 보이나 무언가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인간은 그저 '깨끗하고 밝은 곳'으로 곧잘 피하는 것이다. 모네와 고흐가 끝까지 무언가를 완수했던 것은 허무를 잊으려 애썼기 때문이 아니다. 허무를 마주보고 서서, 운명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카뮈는 말했다.
"높은 곳을 향한 투쟁 그 자체로 인간의 마음을 충분히 채울 수 있다. 우리는 행복한 시시포스를 상상해야 한다."
두고 도망치고 싶은 눈 앞의 바위만이 실제이며, 하나뿐인 나의 운명이다. 우리는 그것만이 자신이 소유한 것이라는 사실을 종종 잊는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운명만이 나의 소유이며, 그것을 넘어설 것인지 또한 나만이 선택할 수 있다.